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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들, 방황에 마침표를 찍다 (신*선,광주)

겉잡을 수 없이 방황하는 사춘기 아들과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어미인 저를 힘들게 하는 자식이 크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져 수없이 많은 날을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매일 아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지쳐가던 어느 날, 우연히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에 가게 됐습니다.
전시 작품 하나하나에는 평생 변치 않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못질을 가슴으로 묵묵히 받아내며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자식에게 웃어 보이는 분이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지난날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을 꼭 안아주며 그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건넸습니다.
“사랑한다. 힘들었지. 이제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렴.”
제 나름대로 힘들었을 아들은 제 품에 안겨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오랜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 아들을 보며 ‘내가 먼저 변하면 되었을 것을…’ 하는 후회가 남았습니다.
얼마 후 집으로 엽서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전시회를 관람한 아들이 보낸 엽서였습니다.
「엄마가 내 옆에만 있어줘도, 아무 말 없이 지켜만 줘도 좋아요.」
몇 글자 쓰여 있지 않은 엽서에 말도 못하게 기뻤습니다.
아들은 이제 웃음이 많은 긍정적인 아이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처럼 평생 아들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싶습니다.

TV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한 장의 엽서 (공*애, 부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의 동생과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을 보러 갔습니다.
전시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둘러보며 연신 눈물을 훔치던 동생은 관람을 마친 뒤 부대 행사장인 ‘사랑의 우편함’ 코너에서
보성에 계신 친정어머니께 엽서를 보냈습니다. 동생은 그동안 사는 게 바빠서 어머니와 연락을 자주 못하고 지냈다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 모친에게 엽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얼마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KBS2 ‘다큐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동생의 엽서가 소개된 것입니다.
당시 프로그램 주제가 ‘가을 편지’였는데 손글씨 편지를 찾고 있던 제작진이 동생의 엽서를 발견하고,
동생에게 받은 엽서를 소리 내서 읽는 모친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동생은 방송을 보고 어머니께서 이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평생 나를 위해 사신 어머니께 변변한 효도 한 번 못해드렸는데
전시회에서 쓴 엽서 한 장으로 어머니의 마음에 위로를 드려서 무척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동생의 집에 편지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어머니의 긴 손글씨 답장이었습니다.
자식의 짧은 엽서에 어머니의 사랑은 그리도 길었나 봅니다.

남편이 달라졌어요 (강*순, 울산)

남편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입니다.
평일이나 쉬는 날이나 집에만 오면 무기력한 모습으로 잠만 자는 남편이 얄미웠습니다.
몸에 해로운 습관을 벗 삼을 때면 더 그랬습니다.
얼마 전,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을 함께 관람하고 막 나왔을 때만 해도 남편의 얼굴에는 별반 감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남편이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거나 쉬는 날이면 빨래며 청소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툭툭 내뱉던 거친 말투도 부드러워지고 건강을 해치는 습관도 뚝 끊은 남편을 보니
어떻게 사람이 180도 바뀔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습니다.
누구보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딸이었습니다. 딸은 아빠가 요즘 얼굴빛이 좋아졌다며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남편이 확 달라진 모습을 보니 저도 그동안 미워했던 마음들이 미안해졌습니다.
남편의 작은 행동, 따뜻한 말 한마디에 행복을 느낍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던 집에 행복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아 살맛이 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바꾸고자 해도 바꿀 수 없었던 남편을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준 전시회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혼 앞둔 가정에 다시 찾아온 행복 (조*경, 시흥)

안타깝게도 친한 동생이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마음이 답답하고 복잡할 것 같아 위로 차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에 초대했습니다.
관람하는 내내 동생은 눈시울을 붉히며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녀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며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읽은 후
동생은 “힘들고 지칠 때, 나도 아이들을 떠올리며 가정을 지켜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전시회를 다녀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편과 화해했다며 이제는 ‘가정의 수호자’인 어머니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시회에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동생을 보며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동생이 행복한 가정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니까요.

엄마와의 보이지 않던 벽을 허물다 (박*인, 울산)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습니다.
그날 이후 사 남매의 장녀였던 저는 홀로된 어머니의 일을 거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마음이 무거웠고,
그 마음은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까지 그 마음은 쉬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에 가게 됐습니다.
마치 누군가 저와 엄마의 삶을 알고 전시 작품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다음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서울에서 열린 ‘우리 어머니’전에 다녀오셨다는 얘길 꺼내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놀라 전시회를 공통 화제로 삼아 옛 일을 추억하며 울고 웃었습니다.
그제야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동안 고생 많았고 우리 사 남매 위해 아름답게 살아줘서 고마워.”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흐르더니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시 후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딸, 고마워.”